독일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
- “T4 작전” 추모공원 내 위령비 텍스트 번역 *
번역: 한국장애포럼
* 독일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특별히 정신장애인을 포함한 수많은 장애인을 말살한 이른바 'T4 작전'이 기획된 장소입니다. 현재 이 자리에는 T4 작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비와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국장애포럼(KDF)은 여러 이유로 해외의 추모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장애인 당사자와 시민들을 위해, 위령비에 새겨진 글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위령비에는 독일어 텍스트와 영문 텍스트가 함께 새겨져 있는데, 이 중 영문 텍스트를 중심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위령비에서 전하고 있는 T4 작전에 관한 정보와 관련 인물들에 대한 공식적 기록을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독일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위치한 “T4 작전” 추모공원 위령비 (사진: 김운영)
“T4 작전”과 홀로코스트
이곳(*위 사진)은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Tiergartenstraße 4)의 빌라가 있던 자리입니다. 해당 건물은 1950년에 철거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1940년에서 1941년 사이, 가스실에서 이루어진 이른바 안락사(Euthanasia) 작전으로 70,000명 이상의 환자들이 대량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 작전은 코드명 “T4 작전” 아래 조직되었습니다. 1941년 말, 공식적으로 살해 작전이 중단된 후에도, 거의 100명의 “T4 작전” 가담자들이 점령지였던 폴란드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이들(T4 작전 가담자들)은 벨제츠(Belzec), 소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에서 디젤 엔진 배기가스를 이용한 대량 학살을 자행한 이른바 “라인하르트 작전(Aktion Reinhardt)”을 수행했습니다. 이 작전으로 최소 160만 명의 유대인과 5만 명의 로마(Roma, ‘집시’로 불리는 로마니계 민족)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그 가담자들의 급여는 여전히 이곳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서 지급되었습니다.
SS 상급돌격대장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 1885년생)는 1940년 1월,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서 약 15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첫 가스실 실험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하르트하임(Hartheim), 그라페네크(Grafeneck), 하다마르(Hadamar)에 위치한 돌봄시설들(care homes)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1941년 가을에는 벨제츠(Belzec) 집단학살 수용소의 건설을 감독하였습니다. 1942년 여름, 그는 ‘라인하르트 작전(Aktion Reinhardt)’의 세 개 학살 수용소 감독관(Inspector)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이 세 수용소가 폐쇄된 이후, 비르트와 다른 T4 작전 가담자들은 1943년 11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산 사바(San Sabba) 수용소를 설립하는 일을 주도하였으며, 유대인 학살에도 가담하였습니다. 비르트는 1944년 봄, 파르티잔(*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무장 저항운동 세력)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의사 임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 1910년생)은 1940년 2월, 브란덴부르크에 위치한 학살 센터의 운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거의 모든 가스살해에 직접 관여하였으며, 그중에는 1940년 7월 10일, 유대인 환자들이 처음으로 살해된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40년 11월부터 그는 새롭게 설립된 베른부르크(Bernburg) 학살 센터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1942년 여름, 트레블링카(Treblinka) 학살 수용소의 건설을 담당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특히 바르샤바 게토(Warsaw Ghetto) 출신 유대인들이 대거 학살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대량 학살을 '문제없이' 조직할 수 없다는 이유로 SS에 의해 그 직책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1944년부터 독일 국방군(Wehrmacht)에서 복무하였습니다. 그는 1948년, 울름(Ulm)의 교도소 감방에서 자살하였습니다.
요한 니만(Johann Niemann, 1913년생)은 1934년부터 1941년 사이, 에스터베겐(Esterwegen)과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강제수용소에서 활동한 도장공(house painter) 출신의 인물입니다. 그는 ‘T4 작전’의 일원으로, 1942년 베른부르크에서 시신을 소각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간헐적으로 소비보르(Sobibor) 수용소의 지휘관을 맡았습니다. 1943년 10월 14일, 600명의 수감자들이 일으킨 소비보르 수용소 봉기 도중, 아르카디 슈바예프(Arkady Shubayev)가 두 차례의 도끼질로 니만을 살해하였습니다. 니만은 수용소 내 재봉소에서 제복을 입어보던 중 살해된 최초의 SS 대원이었습니다.
*위 사진 설명: 1943년 여름 소비보르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니만은 사진 오른쪽에 있습니다. 당시 SS 경비병들은 수용소 내 유대인 수감자들을 공격하도록 훈련된 개들을 자주 자극하여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독일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위치한 “T4 작전” 추모공원 위령비 (사진: 김운영)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국민사회주의자(나치)의 정신적 장애 또는 질병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량 학살 본부가 위치했던 장소였습니다. 이 조직은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있는 한 빌라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계획된 범죄는 이곳의 주소를 따서 ‘T4 작전(Aktion T4)’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1945년 이후, 피해자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정보는 은폐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이 역사적인 장소에 설치된 기념판과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의 조각 작품이, 시설적 환경(institutional settings) 안에서 살해된 환자들을 추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007년, 베를린 시민들은 적절한 추모 공간의 조성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독일 의회는 이 요구를 2011년 11월에 받아들였고, 베를린 주정부는 디자인 공모를 거쳐 2014년 이 추모 공간과 정보 안내소를 일반에 개방하였습니다.
빌헬름 베르너(Wilhelm Werner, 1898-1940)
1919년, 빌헬름 베르너는 ‘백치(idiocy)’라는 진단을 받고 베르네크(Werneck)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는 강제로 불임 시술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40점이 넘는 그림(*위 사진 참조)을 통해, 이른바 '불임의 승리'라 불릴 법한 고통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T4 작전’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1940년 피르나-존넨슈타인(Pirna-Sonnenstein) 학살 센터에서 일산화탄소에 의해 질식사당하였습니다.
안락사 살인으로의 길
1933년 이전부터 ‘적극적 안락사’(좋은 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불치병 환자, 돌봄이 필요한 시설 수용 환자, 그리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들을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발전된 우생학 또는 ‘인종 위생(racial hygiene)’ 이론이 이러한 논의의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1933년, 국가사회주의 정권은「유전병 자손 예방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법은 강제 불임 시술을 허용하였습니다. 또한, 정신 질환이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생명권을 간접적으로 의문시하였습니다.
법률가 칼 빈딩(Karl Binding, 1841–1920)과 정신과 의사 알프레드 호헤(Alfred Hoche, 1865–1943)는 말기 환자를 위한 ‘죽을 권리’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시설에 있는 ‘불치의 백치(incurable idiots)’와 ‘정신적으로 죽은 자(mentally dead)’의 살해(killing)도 주장하였습니다.
정신장애아동시설의 책임자였던 에발트 멜처(Ewald Meltzer, 1869–1940)는, 자신이 ‘안락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의 부모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조사는, 응답자의 거의 4분의 3이 자녀의 ‘고통 없는 생명 단축’에 동의할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유전병 자손 예방법」에 따라, 최대 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당하였습니다. 이들이 ‘선천적 백치’, ‘조현병’, ‘유전성 난청’, 기타 유전성으로 간주되는 질병 또는 중증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다고 주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전 건강 기록과 가계도를 활용하여, 국가사회주의의 ‘인종 위생학자’들은 전체 인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각 개인의 유전적 가치까지 기록하고자 하였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정권은 영화, 잡지, 포스터, 심지어 학교 교육까지 활용하여, ‘백치(idiots)’와 ‘정신병자(insane)’가 인구 전체에 가한다고 여겨진 ‘경제적 부담’(economic burden)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일제 렉샤스 (Ilsze Lekschas, 1895-1940)
일제 렉샤스는 동프로이센의 메멜 지역에 살았으며, 이곳은 1923년에 리투아니아에 점령되었습니다. 1925년부터 그녀는 종교적 망상으로 인해 신경과 치료를 받았습니다. 메멜이 독일에 재합병된 후, 그녀는 솔다우(Soldau) 임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의 가스차에서 살해당했습니다.
환자 살해: 1939 - 1945년
전쟁이 1939년에 시작된 직후, SS(친위대)는 점령지 폴란드에서 수천 명의 독일 및 폴란드 정신과 환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동시에, 독일에서는 ‘심각한 유전 및 선천성 질환의 과학적 등록을 위한 제국 위원회(Reich Committee for the Scientific Registering of Serious Hereditary and Congenital Illnesses)’라는 명목 아래, 정신적·신체적 장애가 있는 최소 5,000명의 아동과 청소년들이 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시설에 수용된 환자들은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서 조직된 이른바 ‘T4 작전’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약 70,000명이 학살 센터에서 가스로 질식사하였습니다. 이후 단계에서는, T4 직원들이 이 센터들에서 약 20,000명의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도 살해하였습니다. 중앙에서 관리된 T4 작전이 1941년 8월에 공식적으로 종료된 이후에도, 살인은 계속되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방임, 굶주림, 약물 투여를 통해 약 90,000명의 추가 시설 수용 환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비센그룬트(Wiesengrund) 병원과 마찬가지로, ‘전문 돌봄을 위한 아동 병동(children’s wards for expert care)’이 약 30개의 다른 시설과 병원에 설치되어, 아동과 청소년을 살해하고, 일부 경우에는 그들을 연구 대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베를린의 ‘T4 작전’ 직원들은 환자 이송 명단을 작성하고, 가짜 회사인 ‘자선 구급차 서비스’ 소속 버스를 이용하여 환자들을 학살 센터로 이송하였습니다. 이 센터들은 환자들을 살해하기 위해 설치된 곳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병상 부족이 발생하였습니다. 정신과 환자들은 종종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시설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환자들을 일부러 굶기거나 약물로 살해하였으며, 이는 1942년부터 하다마르(Hadamar) 정신병원에서 이루어지던 일이었습니다.
메제리츠-오브라발데(Meseritz-Obrawalde) 시설의 등기과는, 그곳에 살해 목적으로 이송된 최소 7,000명의 환자들의 사망 원인을 조작하였습니다.
이르마르트 덴커(Irmgard Denker, 1917-1944)
1943년, 이르마르트 덴커는 브레멘(Bremen)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그곳에서 딸을 출산했습니다. 병원이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후, 그녀는 300명 이상의 다른 환자들과 함께 메제리츠-오브라발데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으며, 공식적으로는 음식 거부로 인한 탈진이 그녀의 사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안락사 범죄에 대한 반응
‘안락사’ 범죄의 희생자들은 모든 계층에서 나왔습니다. 살인은 완전히 은폐될 수 없었습니다. 잦은 사망 보고는 가족들 사이에 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이러한 살인을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항도 존재했습니다.
사법부와 교회의 대표자들 중 소수만이 ‘안락사’에 반대하였습니다. 1941년 8월, 뮌스터(Münster) 주교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그라프 폰 갈렌(Clemens August Graf von Galen, 1878–1946)이 행한 설교는 중앙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살인 캠페인의 중단으로 이어졌습니다.
T4 작전이 시작될 무렵,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부고가 계속해서 늘어났습니다. 1941년 봄부터는 더 이상 이러한 부고를 인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의 강제 이송과 살해에 대한 소문은 1940년 비엔나에서의 항의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아들 알프레드(Alfred)가 ‘전문 돌봄을 위한 아동 병동’에 수용되고 1년 뒤 살해당했던 아나 뵈들(Anna Wödl)도 이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수송이 도착할 때마다, 곧이어 커다란 검은 연기 구름이 보였습니다.”라고 하르트하임(Hartheim) 학살 센터를 몰래 촬영했던 현지 주민 칼 슈만(Karl Schuhmann, 1921–2000)은 증언하였습니다
알베르트 F. 씨가 편지를 통해 자신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더 이상 심한 고통을 견디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며칠 후, 그의 두 살 된 아들 하인츠(Heinz)는 아이히베르크 주립병원(Eichberg State Hospital)의 ‘전문 돌봄을 위한 아동 병동’에서 살해당하였습니다.
1941년 8월 초, 비밀리에 전단지로 배포된 설교를 통해 그라프 폰 갈렌(Graf von Galen) 주교는 ‘안락사’ 살인을 규탄하였습니다. 이 설교는 주민들 사이에 커다란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빌헬미네 하우스너(Wilhelmine Haußner, 1927–1942)
빌헬미네 하우스너는 어린 시절 뇌염을 앓았고, 그 이후로 또래보다 정신 발달이 더뎠습니다. 그녀는 1932년부터 쇤브룬(Schönbrunn) 가톨릭 요양원에 살았습니다. 1941년, 그녀는 에글핑-하아르(Egfling-Haar) 시설로 옮겨졌으며, 그곳의 ‘전문 돌봄을 위한 아동 병동’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녀는 1942년 11월 7일에 폐렴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실제로는 진정제를 투여받아 살해되었습니다.
정신과 시설 안에서의 ‘선별’(Selection)
1933년부터 당국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이미 시작되었던 정신병원에 대한 긴축 조치를 대폭 강화하였습니다. ‘불치(incurable)’ 환자들과 노동이 불가능한(unfit for work) 환자들이 특히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작센(Saxony) 주에서는 1938년에 노동을 하지 않는 시설 거주자들에게 영양이 부족한 식단을 도입하였습니다.
이후 T4 작전은 노동이 불가능하거나 많은 돌봄이 필요한, 혹은 ‘문제가 된다’(troublesome)고 여겨진 시설 수용 환자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시설의 의사들은 이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안락사’ 희생자를 선별하는 데 사용된 등록 양식을 작성하였습니다.
정신 질환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른바 ‘반사회적’ 인물들을 배제하는 정책으로 인해 1933년 이후 환자 수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동시에 돌봄에 쓰이는 예산은 줄어들었습니다. 돌봄 부족, 굶주림, 그리고 질병이 환자들의 일상을 규정하였습니다.
국가사회주의 하에서, 환자가 시설에서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 생존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쓸모없는 식객(useless eaters)’들은 살해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노동 생활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신과 치료에 있어, ‘교육 불가능’(ineducable)한 아동과 청소년들, 예를 들어 15세의 베르너 B.(Werner B., 1925–1940)와 같은 이들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베르너 B는 1940년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Brandenburg an der Havel)의 학살 센터에서 살해당하였습니다.
소피 W.(Sophie W., 1900–1941)는 T4 작전의 대표적인 희생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조현병(schizophrenia)’을 앓았으며, ‘불치(incurable)’, ‘전혀 접근할 수 없음(wholly unapproachable)’, 그리고 ‘노동 불능(incapable of work)’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안나 렌커링(Anna Lehnkering, 1915–1940)
안나는 사랑스럽고 온순한 아이였으나,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유전병’ 환자로 간주되어, 1935년에 강제 불임 시술을 받았고 1936년에는 베드부르크-하우(Bedburg-Hau)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루기 힘들고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녀는 1940년 3월 ‘T4’ 위원회에 의해 선별되었고, 이후 그라페네크(Grafeneck) 학살 센터에서 가스로 질식되어 살해당하였습니다.
T4 작전의 행정
총통사무국(Chancellery of the Führer)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 직접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의 의사들과 행정 직원들은 1940년에 시설 수용 환자들의 등록과 선별, 그리고 이들의 학살 센터로의 이송을 조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만들어진 행정 체계는 모든 일이 원활히 진행되고 대량 학살이 비밀리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T4 작전이 반대 시위로 인해 중단된 후에도, 행정 본부는 약물을 이용한 살해를 관리하려 했고, 환자 등록 양식 작성을 계속하였습니다. 가담자들은 관료적이고 비인간적인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1939년 10월, 전쟁이 시작된 시점으로 소급된 한 문서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주치의인 카를 브란트(Karl Brandt, 1904–1948)와 총통사무국 장관 필리프 보울러(Philipp Bouhler, 1899–1945)에게, 불치 환자들에게 이른바 ‘자비로운 죽음(mercy death)’을 허용할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1940년 4월부터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의 ‘중앙 사무소(central office)’에서는 60명 이상의 의사, 행정 직원, 운전사들이 환자 살해를 조직하는 데 관여하였습니다.
모든 정신의료 기관에 발송되는 등록 양식을 사용하여, 네 명의 의학 전문가는 환자가 죽을지(빨간색 더하기 표시) 또는 살아남을지(파란색 빼기 표시)를 결정하였습니다.
치료 및 시설 돌봄을 위한 자선 재단(Gemeinnützige Stiftung für Anstaltspflege)은 환자 살해를 은폐했던 네 개의 위장 조직 중 하나였습니다. 이 조직의 임무 중 하나는 T4 프로그램에 인력을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를 아렌트(Karl Ahrendt, 1853–1941)
1907년, 마부 카를 아렌트는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에서 장군의 외투를 입고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베를린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되었습니다. 1941년 3월 18일 베른부르크(Bernburg) 학살 센터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 그는 33년의 세월을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가스실에서의 대량 학살
환자들의 살해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T4’ 조직은 독일에 총 여섯 곳의 학살 센터를 설립하였습니다. ‘T4’ 직원들은 처음에 환자들을 중간 시설에 몇 주간 모아둔 뒤, 이들 중 한 곳의 학살 센터로 이송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절차는 은폐를 목적으로 했으며, 각각의 학살 시설이 그 시점의 ‘살해 역량’(killing capacity)에 맞춰 조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보통 환자들은 ‘안락사’ 시설에 도착한 당일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가스실에서 질식사를 당하였으며, 시신은 소각되었습니다.
가스로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해, ‘T4’ 조직은 다섯 곳의 정신병원(하다마르, 그라페네크, 베른부르크, 피르나-존넨슈타인, 하르트하임)과 이전 교도소였던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Brandenburg an der Havel)을 학살 센터로 개조하였습니다.
‘T4’ 직원들은 환자들이 학살 센터에 도착했을 때 마치 정상적인 입원 절차인 척 가장하였고, 이후 그들을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로 안내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T4’ 조직은 살해된 환자들의 재산을 통해 이득을 취했습니다. 가치 없다고 여겨진 개인 소지품들은 희생자들의 유해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의 가족들은 이른바 ‘조의 편지’를 통해 친족의 사망 소식을 통보받았습니다. 이 편지들에는 사망 원인, 날짜, 장소에 대한 허위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가담자들 - 악세서리 - 이득을 취하는 자
베를린의 ‘T4’ 본부와 가스에 의한 살해가 이루어진 시설들을 통틀어 약 500명의 사람이 T4 작전의 조직과 운영에 직접 관여하였습니다. 사법부는 이 살인 작전을 은폐하였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출세주의, 신념, 혹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때문에 이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들의 시각에서, 치료와 말살은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전문가로서 그들은 희생자들을 선별했고, 학살 센터에서는 직접 가스 밸브를 열었습니다. 정신의료 기관에서는 약물을 사용하거나 거주자들을 굶겨 환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거나 희생자들의 뇌를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간호사들도 의사들과 함께 T4 작전에 협력하였습니다.
각각의 T4 학살 센터마다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근무했습니다. 여기엔 최소한 2명의 의사와 다수의 간호 직원, 사무 직원, 운전자, 경호원, 그리고 시체-소각자들(corpse-burners)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T4 조직의 의료 책임자였던 헤르만 파울 니체(Hermann Paul Nitsche, 1876–1948)는 ‘안락사’ 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드레스덴(Dresden)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사형은 1948년에 집행되었습니다.
프리데리케 푸쉬(Friederike Pusch, 1905–1980)는 브란덴부르크-괴르덴(Brandenburg-Görden) 주립병원의 의사로, ‘안락사’ 범죄에 가담하였으나, 불리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동독(GDR)에서 정신과 의사로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 일할 수 있었습니다.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의 총무로서, 프리드리히 틸만(Friedrich Tillmann, 1903–1964)은 살인 프로그램의 집행을 담당하였습니다. 1960년에 그에 대한 형사 소송이 시작되었으나, 그의 사망 후 중단되었습니다.
뇌 연구자 율리우스 할러포르덴(Julius Hallervorden, 1882–1965)은 최소 700명의 ‘안락사’ 희생자들의 뇌를 자신의 연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연구 결과를 1945년 이후에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발표하였습니다.
아돌프 발만(Adolf Wahlmann, 1876–1956) 박사는 1942년부터 하다마르(Hadamar) 학살 센터의 책임자였으며, 집단 학살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고 처음에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52년에 석방되었습니다. 남성 간호사 칼 빌티히(Karl Wiltig, 1894–1946)는 강제 노동자 살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에 처형되었습니다.
안락사와 홀로코스트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대량 학살은 T4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40년, 거의 모든 유대인 정신과 환자들은 그들의 인종 때문에 살해당했습니다. 안락사 살해가 1941년에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에게로 확대(14f13 작전)되었을 때, 의사들은 의도적으로 유대인 수감자들을 선별하였습니다.
T4 직원들은 동부 독일의 절멸 수용소에서 범죄를 계속 저질렀습니다. 약 120명의 T4 인력이 점령된 폴란드 지역에서 라인하르트 작전(Operation Reinhardt)에 가담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최소 16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학살 센터의 책임자였던 이르므프리트 에벨(Irmfried Eberl, 1910–1948)은 유대인 환자 수송이 도착할 때마다 자신의 일기에 “J”라고 기록하여 표시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랑에(Herbert Lange, 1909–1945)는 처음에 폴란드와 독일 환자 수천 명을 살해한 SS 특수부대를 지휘하였습니다. 1941년 말부터 그는 헬름노(Chelmno) 절멸 수용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152,000명 이상의 사람들, 주로 유대인들이 가스차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벨제츠(Belzec), 소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절멸 수용소의 지휘관들은 모두 T4 조직의 일원이었습니다. T4의 운전사이자 ‘시체 소각자’였던 로렌츠 하켄홀트(Lorenz Hackenholt, 1914–1945?)는 벨제츠의 가스실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41년 소비에트 연합의 침공 이후, 독일군은 점령한 동부 지역에서 최소 17,000명의 정신과 환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1941년, 벨라루스 모길료프(Mogilev)에 있는 시설 수용 환자들은 병원 병실을 개조한 가스실에서 살해당했습니다.
1945년 이후의 안락사 범죄 처리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신과 환자들은 계속해서 차별을 받았고, 우생학적 사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안락사’ 재판에서 엄중한 처벌을 받은 가해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관련된 대부분의 의사들은 책임을 면했습니다.
1987년에는 ‘안락사’와 강제 불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연합(Federation of the People Damaged by “Euthanasia” and who Underwent Compulsory Sterilisation)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오늘날까지도 이들이 국가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박해받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싸우고 있습니다. 독일 연방의회는 2007년에야 강제불임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습니다.
칼 브란트(Karl Brandt)와 빅토르 브라크(Viktor Brack)는 ‘안락사’ 살해의 주요 책임자 두 명으로, 1947년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Nuremberg Doctors’ Trial)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000년에 유수프 이브라힘(Jussuf Ibrahim, 1877–1953)이 예나(Jena) 대학 아동병원장으로서 1943년과 1944년에 아이들을 ‘안락사’ 대상으로 직접 추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많은 예나 시민들이 이 도시의 명예 시민이자 동독(GDR)의 ‘인민의 명예 박사’인 그를 옹호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심지어 1964년이 되어서도, 라이프치히 아동 대학병원의 ‘전문 돌봄을 위한 아동 병동’ 책임자이자 ‘제국 위원회(Reich Committee)’ 전문가였던 베르너 카텔(Werner Catel, 1894–1981)은 여전히 ‘저능아(idiotic children)’들이 ‘그들의 불행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1938년에 강제 불임 시술을 받았던 파울 불프(Paul Wulf, 1921–1999)는 재활을 위해 싸웠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전시회를 통해 국민사회주의자들의 의료 범죄(medical crimes)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간호사 클라라 노박(Klara Nowak, 1922–2003)은 강제 불임 시술로 인해 평생 고통을 겪었습니다. 1987년, 그녀는 ‘안락사’ 및 강제 불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연합(Federation of the People Damaged by ‘Euthanasia’ and who Underwent Compulsory Sterilisation)을 공동 설립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저, 미천한 존재인 저는, 제 안에 있는 인간적 존재를 언제나 지키고자 합니다.”
칼 아렌트 (베젠베르크 1853–1941, 베른부르크에서 살해됨),
1933년 베를린-부흐 주립병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들 정신의학적 범죄는 환자 안에서 다시금 동료 인간을 보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도로테아 벅
(1917–2019, 1936년 베텔에서 강제 불임 시술을 당함, 조각가이자 작가,
독일 연방 정신의학 경험자 협회 공동 설립자)
“만약 우리 또한 전쟁 시기에 살고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는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더 이상 우리를 알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엘케 하인젤베커
(1959년 출생, 2003년부터 Mensch zuerst – Netzwerk People First Deutschland e.V. 회원)
독일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위치한 “T4 작전” 추모공원 위령비 (사진: 김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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